2012년 01월 14일
하루키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의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만난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라고 번역된, 그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였다. 꽤나 두꺼운 책이었기 때문에 읽는데 한참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군대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대를 떠나 훈련을 나가서까지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렇게 두 달이 넘게 걸려 드디어 책을 다 읽었을 때, 독서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왠지 모를 찝찝함이 계속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이후, 하루키의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지만, 왠지 그 찝찝함이 떠나질 않아 선뜻 책을 고르기 힘들었다. 물론 내가 책을 많이 읽지 않았고, 굳이 하루키가 아니더라도 다른 읽을 책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앞으로 하루키의 책을 고를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쯤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보게 될지는 나도 예상치 못했다. ‘렉싱턴의 유령’이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흥미로웠다. 소설은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하루키 본인인지 아닌지 모를 작가인 ‘나’가 등장해 렉싱턴의 저택에 사는 케이시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소설은 기묘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여행을 간 케이시를 대신해 저택에서 머물게 된 ‘나’는 그날 밤, 유령들의 파티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이후 케이시가 돌아올 때까지 유령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반년 정도가 지나고, 케이시를 만난 ‘나’는 케이시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뜬금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느꼈던 왠지 모를 허무함과 씁쓸함을 다시 한 번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여기서 유령의 정체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과연 케이시는 유령이었을까? 아니면 그때 그 유령들은 무엇이었을까? 따위의 문제를 고민한다. 사실 케이시의 정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루키의 의도는 의외로 소설의 첫 문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 문장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하지만 이 문장은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소설의 리얼리티가 유령이라는 허구의 존재와 기묘하게 엮이며 소설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유난히 희귀 레코드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집착한다. 사건이 벌어지면 독자들은 소설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에 대한 설명은 소설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레코드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저택의 묘사 등이 소설의 리얼리티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사실인 것 마냥,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가던 소설은 유령의 등장과 함께 공중으로 붕 떠버린다. 소설 전체가 유령이 된 것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하루키라고 은연중에 믿어버리지만, 이조차도 결국 유령이 되어 버린다. 케이시도 물론, 유령이 된다.
하루키의 유령은 소설 그 자체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유령이다. 개도, 저택도, 레코드 컬렉션도 모두 유령이다. 독자들은 결국 환영 속을 헤맨 것이다. 왠지 모를 찝찝함이 바로 이것이다. 하루키는 결국 독자조차도 유령으로 만들어 버린다. 누가 나를 위해 잠을 자줄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유령이 된 것이다. 차라리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잠을 더 자는 것이 훨씬 나을 지도 모른다.
# by | 2012/01/14 03:05 | 글쓰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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